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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은장도: 장신구인가, 호신용인가?

by koreaminc 2025. 3. 12.

전통 은장도
경상남도 무형유산 '은장도'[사진출처=국가유산포털 홈페이지 캡처]

 

영화나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은장도(銀粧刀). 조선 시대 여성들의 필수품 중 하나였던 은장도는 단순한 장신구였을까요, 아니면 실제로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된 호신용 무기였을까요? 은장도는 한국의 전통 문화 속에서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은장도는 장신구로써의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여성의 정절과 자기 보호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전통 은장도,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은장도는 평복에 차는 노리개의 하나로,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이 시작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됐다고 합니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 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지했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으며,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 남녀 중 은장도를 착용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신분을 가리는 기준이었고, 명나라에 금·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가의 규수들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 여성들에게도 은장도가 보급됐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허리에 차거나 옷고름에 매다는 형태로 착용했다고 해요.

은장도, 장신구일까? 호신용일까?

그럼 은장도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은장도는 정교한 세공과 화려한 장식으로 인해 여성들의 장신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칼집과 칼자루에는 섬세한 문양이 새겨졌으며, 은으로 제작된 장도는 귀한 공예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칼집에는 나비, 모란, 당초무늬 등의 길상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일부 은장도에는 옥이나 산호 등의 보석이 박혀 더욱 아름답게 꾸며졌습니다. 또한, 신부의 혼수품으로도 은장도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이는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여성이 결혼 후에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은장도는 단순한 장식품을 넘어 실제로 호신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여성들은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다니며 유사시 자결하거나 상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는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은장도가 단순한 미적 장신구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와 명예를 지키는 결기의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함께, 은장도는 독을 탐지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은이 특정 독성 물질과 반응하여 변색된다는 점에서 당시 여성들이 외부에서 식사할 때 은장도를 젓가락처럼 사용하여 음식 중 독의 유무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종류도  다양했던 은장도

은장도는 제작 방식과 장식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대표적인 형태로는 을(乙) 자 모양을 띤 을지도, 네모난 디자인의 사모장도, 여덟 개의 면을 가진 팔모장도, 칼자루와 칼집이 원통형으로 제작된 맞배기장도, 그리고 칼집에 젓가락을 함께 수납할 수 있는 첨자도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은장도는 여성의 미적 감각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부녀자들이 장도를 노리개로 옷고름에 차면 이를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은 '낭도(囊刀)'라 불렀다고 합니다. 패도의 크기는 큰 경우 전장 5촌(약 15cm), 도신(칼날) 3촌(약 9cm) 정도이고, 작은 것은 전장 3촌, 도신 1.5촌이며, 낭도는 전장 3촌, 도신 1.5촌 크기가 보통이었습니다. 은장도의 재료는 주로 은이며, 도신은 강철로 제작되었고, 도신에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문양화해 새기기도 했습니다.

이제 은장도는 더 이상 호신용 무기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전통 공예품으로써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은장도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며, 그 속에 깃든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죠.